중력을 안고 중력을 넘어서다
황 인(미술평론가)
황 인(미술평론가)
나태주의 작업은 중력을 주제로 삼고 있다. 회화와 중력, 이 둘은 쉽게 연결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회화에는 구상(構想)의 단계에서부터 위와 아래를 관통하는 중력의 법칙이 화가의 의식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 중력과 이에 저항하는 수직항력, 이 둘의 균형감각에서 그림은 안정감을 찾는다. 이런 균형감각은 실재하는 대상에서 출발하는 구상회화에서 매우 강하게 나타나지만 대상이 없는 추상회화라 할지라도 그 원리는 똑같이 적용된다. 그런데 어떤 회화, 예컨대 중력과 수직항력이 하나의 표층으로 겹쳐버린 화면에서는 중력의 개입이라는 작용이 무의미할 때도 있다. 캔버스를 바닥에 뉘어놓고 그리는 그림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경우 화면의 상하좌우는 더 많은 자유도를 가질 수가 있다. 벽에 걸린 그림을 90도, 180도, 270도로 돌려도 화면은 여전한 균형감각을 유지한다. 나태주는 중력을 기준으로 한 회화의 두 양상 즉, 중력이 작용하는 회화와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회화의 차이를 분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양상의 회화가 겹치는 경지의 회화를 시도하고 있다. 더 나아가 중력이 작용하는 세계와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세계, 이 두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유들을 통합하는 작업을 전개하고자 한다. 전통적인 풍경화는 자연계의 중력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건 우리가 우리에게 생래적으로 주어진 중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사물을 보는 것의 연장선에 놓여있다. 그런데 우리가 물구나무를 서서 사물과 세상을 바라본다면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일상적인 몸의 자세가 받아들이고 있는 지각의 중력의 방향이 역전되었기 때문이다. 신체가 받아들이고 있는 중력의 감각과 수직항력의 감각을 이어주는시각(視覺)의 균형감각이 무너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림을 그릴 때는 몸이 받아들이는 중력과 수직항력 그리고 이를 관통하는 시각이 조화롭게 일치하도록 한다. 이런점에서 대부분 화가들의 화폭에는 늘 중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시각은 인체가 가진 감각 중에서 가장 원거리 감각이다. 시각이 소실점 너머까지 가 본다면 어찌 될까. 소실점 너머의 세계에서는 지상에서 느끼는 중력이 희박해지거나 전혀 작용하지 않을 것이고 추측할 수가 있다. 실제로도 그렇다. 이 지점부터는 중력, 수직항력 등 사물과 세상을 이어주는 중력 감각은 무의미해진다. 중력이 작용하는 세계는 우리의 신체 감각이 닿을 수 있는 지각의 세계에 한해서다.
중력을 벗어난 세계는 인간의 신체 감각은 닿을 수가 없으나 인식은 닿을 수 있는 세계다. 감각의 중력을 벗어난 세계, 인식만이 다다를 수 있는 세계의 질서를 상상할 수가 있다. 감각이 미치는 유한한 세계를 장소(place)라 하고 인식만이 닿을 수 있는 무한한 세계를 공간(space)이라 한다. 신체의 감각 중에서 가장 원거리 감각인 시각이 닿을 수 있는 최종지점인 소실점 너머의 세계를 공간이라 할 수가 있다. 기하학(Geometry)이라 했을 때, 땅을 의미하는 Geo는 장소의 세계, 연산을 의미하는 Metry는 공간의 세계가 된다. 기하학은 땅이라는 장소에서 출발했지만, 그 수학적 완성은 땅을 떠난 곳, 소실점을 벗어난 인식만이 닿을 수 있는 공간의 세계, 메트리의 세계에서 이루어졌다. 장소와 공간은 별개인 것 같지만 문명을 가진 인간에게 있어 이 둘은 서로 보완관계를 이룬다. 하나의 사물 혹은 사건이라 하더라도 장소의 감각에서 지각해야 할 때가 있고, 이를 공간의 질서로 환원하여 다루어야 할 때가 따로 있다. 인상파까지의 회화는 주로 장소의 세계를 다루어 왔다. 절대주의, 구성주의 미술, 미니멀 아트에 이르면 회화는 공간의 질서로 환원된 세계를 적극적으로 다루기 시작한다. 만유인력이란 말이 있듯, 모든 사물과 사물 사이에는 인력이 작용한다. 중력은 지구라는 사물의 인력과 지구의 원심력을 더한 값이다. 인간의 시각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먼 지점인 소실점을 넘어선 세계라 할지라도 중력이 희박해졌을 뿐 사물들이 존재한다면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인력은 작용할 수가 있다. 지각을 뛰어넘은 우리의 인식이 사물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균질공간(universal space)을 향할 때 인력과 중력이 전혀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가 있다. 장소 혹은 자연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수학의 세계, 질서의 세계, 논리의 세계는 지극한 균질공간에서 성립한다. 그리고 이 세계는 인공(artificial)의 모태(matrix)일 수도 있다. 아트(미술)와 아트피셜이 동일한 어원의 낱말임을 떠올린다면 장소를 주로 다루어 왔던 미술이라 할지라도 그 본질 속에 공간을 숨겨왔는지도 모른다.
나태주의 회화 역시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부분의 회화는 캔버스를 이젤에 세워 놓고서 그리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중력과 수직항력의 방향성을 쉽게 느낄 수가 있다. 나태주의 경우, 화폭을 바닥에 편평하게 눕혀서 그린다. 이 경우 중력의 방향성을 느끼기가 힘들다. 중력의 방향을 지각하지 못하면 위아래의 감각도 사라진다. 나태주의 그림은 위아래가 없는 그림으로 보이기가 쉽다. 위아래가 없는 그림은 좌우의 감각도 무화된다. 화폭을 바닥에 눕혀서 그리더라도 중력을 받고 있는 즉, 상하좌우의 감각을 지닌 작가의 신체성이 화폭에 전달되면 작품의 결과 역시 중력의 방향성을 그대로 남기게 된다. 캔버스를 바닥에 눕혀 그린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어떤 경우, 위아래가 분명하게 구별되는 화면이 형성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나태주의 경우는 화폭에 작가의 신체성의 개입을 최대한으로 절제한다. 될 수 있으면 물감을 작가의 신체와 분리시켜, 물감이 스스로 그림을 그려나가게 한다.
대부분의 물감은 안료와 미디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태주의 물감은 안료(피그먼트)와 레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레진이 미디엄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같은 성분을 가진 안료라 할지라도 그 알갱이들의 굵기와 무게는 각각 다르다. 굵기가 달라지면 색상과 명암도 달라진다. 레진은 어느 정도의 점성을 갖고 있다. 캔버스에 물감을 부으면 크기가 다른 안료 알갱이는 레진에 실려 흘러가면서 색층을 형성한다. 안료의 알갱이가 무겁고 굵은 것은 조금 흘러가다가 멈추고 가볍고 가는 것은 레진이 흐름을 따라 멀리까지 도달한다. 그 도달지점의 차이에 따라 하나의 색층(색의 레이어)에서도 명암의 차이를 보여주는 색상의 그라데이션이 발생한다.
나태주의 회화 역시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부분의 회화는 캔버스를 이젤에 세워 놓고서 그리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중력과 수직항력의 방향성을 쉽게 느낄 수가 있다. 나태주의 경우, 화폭을 바닥에 편평하게 눕혀서 그린다. 이 경우 중력의 방향성을 느끼기가 힘들다. 중력의 방향을 지각하지 못하면 위아래의 감각도 사라진다. 나태주의 그림은 위아래가 없는 그림으로 보이기가 쉽다. 위아래가 없는 그림은 좌우의 감각도 무화된다. 화폭을 바닥에 눕혀서 그리더라도 중력을 받고 있는 즉, 상하좌우의 감각을 지닌 작가의 신체성이 화폭에 전달되면 작품의 결과 역시 중력의 방향성을 그대로 남기게 된다. 캔버스를 바닥에 눕혀 그린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어떤 경우, 위아래가 분명하게 구별되는 화면이 형성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나태주의 경우는 화폭에 작가의 신체성의 개입을 최대한으로 절제한다. 될 수 있으면 물감을 작가의 신체와 분리시켜, 물감이 스스로 그림을 그려나가게 한다.
대부분의 물감은 안료와 미디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태주의 물감은 안료(피그먼트)와 레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레진이 미디엄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같은 성분을 가진 안료라 할지라도 그 알갱이들의 굵기와 무게는 각각 다르다. 굵기가 달라지면 색상과 명암도 달라진다. 레진은 어느 정도의 점성을 갖고 있다. 캔버스에 물감을 부으면 크기가 다른 안료 알갱이는 레진에 실려 흘러가면서 색층을 형성한다. 안료의 알갱이가 무겁고 굵은 것은 조금 흘러가다가 멈추고 가볍고 가는 것은 레진이 흐름을 따라 멀리까지 도달한다. 그 도달지점의 차이에 따라 하나의 색층(색의 레이어)에서도 명암의 차이를 보여주는 색상의 그라데이션이 발생한다.
끈적끈적한 레진은 물처럼 빠른 속도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느린 속력으로 흘러가다가 적당한 지점에서 필경 멈추고 만다. 레진을 멈추게 하는 또 하나의 힘은 액상 물질에 고유한 표면장력이다. 색층의 끝에는 표면장력이 형성시킨 볼록한 색층이 형성된다. 안료가 다다른 윤곽의 볼록한 색층은 다소 고집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마치 여기까지가 나의 도메인(domain,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도메인의 감각은 장소에서 발생한다. 나태주가 공간의 경지를 향해 장소의 힘인 중력을 무화하려 캔버스를 바닥에 누이고 물감 스스로가 그려나가게 하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도메인의 윤곽을 통해서 중력은 끈질기게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표면을 가진 유체는 중력에 저항하며 표면장력을 발생시킨다. 유체의 표면은 촉각을 환기하는 고체 물성의 표면과는 사뭇 그 느낌이 다르다. 액상 물질의 작업을 통해 물성도 힘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힘은 중력에 저항하며 유체의 표면을 볼록하게 솟아오르게 하는 힘이다. 고체 물성의 표면과 액상 물성의 표면의 물성은 힘의 유무가 달라지고 그에 때라 화폭이 낼 수 있는 표정도 많이 달라지게 된다. 유체의 표면에 형성된 물성은 힘의 감각을 느끼게 된다. 색층의 레이어가 겹침에 따라 이 표면장력의 힘은 서로 겹치며 매우 매력적인 빛과 색채의 향연을 펼치게 된다. 화면의 중심에서부터 빛이 돋아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이 효과를 위해 나태주는 레진의 점도와 유체역학, 표면장력 힘들 사이의 관계를 치밀하게 계산한다. 이러하여 완성된 그림에는 상하의 감각이 매우 미약하다. 좌우 역시 마찬가지다. 작품을 90도, 180도, 270도 회전하여도 구성과 밸런스가 무너지지 않는다. 이는 관객에게 매우 특이한 감각을 전달한다. 물구나무를 서면 이 세상이 매우 위태롭게 보이고 작품을 거꾸로 걸면 작품이 위태롭게 보인다. 그런데 나태주의 작업은 그런 중력의 세계를 벗어나 있다. 메트리가 만든 솔리드한 기하학적 도형처럼 작품의 상하좌우를 바꾸어도 여전히 안정된 구조를 가진다.
나태주가 화면 속에서 장소성과 공간성을 동시에 고려하고 있다는 게 여기서 알 수가 있다. 기하학은 매우 솔리드하다. 솔리드한 구조는 중력에서 벗어나 있으니 전후좌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만큼 구성의 자유도가 높아진다.나태주의 작업은 솔리드한 기하학이 아니라 레진의 액상적인(리퀴드한) 상태에서 출발한다. 액상적이다 함은 솔리드함의 반대개념이다. 나태주는 특이하게 리퀴드한 물성을 통해서 솔리드한 기하학적 구조만이 가지질 수 있는 상하좌우 자유도의 증대를 확보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액상 기하학의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액상 기하학, 형용모순의 표현 같지만 바로 그 지점이 나태주의 작가적 역량과 개성이 다다른 남다른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태주가 화면 속에서 장소성과 공간성을 동시에 고려하고 있다는 게 여기서 알 수가 있다. 기하학은 매우 솔리드하다. 솔리드한 구조는 중력에서 벗어나 있으니 전후좌우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만큼 구성의 자유도가 높아진다.나태주의 작업은 솔리드한 기하학이 아니라 레진의 액상적인(리퀴드한) 상태에서 출발한다. 액상적이다 함은 솔리드함의 반대개념이다. 나태주는 특이하게 리퀴드한 물성을 통해서 솔리드한 기하학적 구조만이 가지질 수 있는 상하좌우 자유도의 증대를 확보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액상 기하학의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액상 기하학, 형용모순의 표현 같지만 바로 그 지점이 나태주의 작가적 역량과 개성이 다다른 남다른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